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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68혁명의 시회적 배경 1968년은 시기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베이붐 세대가 자라 대학생이 될 무렵이었다. 세계대전 이후 유럽사회는 구조적으로 약화되어 불안정한 상태를 타파하기 위해 여러가지 사회 개혁을 단행했다. 그 결과로 새로운 중간층이 증가했고, 그에 따라 교육 기회도 놀랄 만하게 확대되었다. 당시 프랑스의 대학생 수는 10년 전에 비해 무려 10배나 늘어나 있었다(1967년 미국의 대학생 수는 600만명, 서유럽에는 250만명, 일본에는 50만명에 달했다). 68년 당시 대학생들은 과거의 대학생들이 소수 엘리트란 특권을 부여받고 자신들이 원하는 사회적 지위가 보장되었던 것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떨어진 상태였고, 졸업 후에도 이러한 구조적 낙오가 계속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기에 미래에 대한 불안이 가득했다. 뿐만 아니라 늘어난 대학생의 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시설물과 노쇠한 교수의 판에 박힌 강의, 그리고 낡아빠진 커리큘럼 등등 대학 내의 여러가지 제반사항들이 정치적으로 무관심하고 냉소적이었던 이들 전후세대들의 눈에도 당시 대학의 보수성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정도였다. 게다가 자신들의 사회적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체제, 어떤 심각한 비판도 달가워하지 않는 정치 질서, 가난한 제3세계와 잔인한 전쟁을 벌이는 제국주의, 그리고 그 어떤 약속도 이행하지 않는 체제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실업을 퇴치하지도 못했고, 파시즘의 대두도 막지 못하고 그들에게 굴복했던 부모 세대들에게 비판적이었던 대학생들은 당시 대학체제의 권위에 대한 거부와 열악한 교육 현실에 대한 분노로 학생 운동을 시작했고, 68년 5월 혁명은 출발하게 되었다.
II. 68혁명의 발단 및 전개 1. 68혁명의 발단 프랑스의 5월 혁명을 중심으로 놓고 보면 68혁명의 중요한 발단은 3월의 파리 낭떼르 대학의 작은 학내분규에서 시작되었다. 남학생들이 여학생 기숙사를 자유로이 방문할 수 있게 해달라는 그들의 요구는 권위적이던 학교 당국의 거부로 일단의 학생들이 대학의 행정처를 점거하면서 시작되었다.
2. 68혁명의 전개 이 사건은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기숙사 분규로 비춰지지만, 그 내부에는 기성체제의 권위주의에 대항한 신세대의 항거라는 상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 당시 대학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은 이미 쌓일대로 쌓여 있었기 때문에 5월에 이르자 이 작은 학내분규는 학생 운동의 중심지인 소르본 대학까지 옮겨가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교육 개혁 투쟁으로, 사회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이들 학생들의 불만이 처음 표출된 것은 파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프랑스 동북부의 스트라스부르대학 학생동맹은 1966년부터 『경제, 정치, 심리, 성적 특히 지적 측면에서 고찰한 학생사회의 빈곤과 몇 가지 개선방안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만들어 개강 시기에 맞춰 학생들에게 배포하기 시작했다. 문건의 내용은 "지금의 대학과 교육정책이 기계적이고 부분적이며, 사고력과 교양이 결핍된 학생들을 대량으로 제조하고 있다. 경제체제와 현실여건을 핑게로 대학은 학생들에게 사회 전체를 전망하는 시야를 제공하지 못하고, 지식의 품질은 저하되고 있으며, 학생들은 빈곤하다"는 것이었다. 이 문건들은 대학생 내부에 잠재한 전반적인 불만을 집약해 표현함으로써 수많은 학생들의 공감과 동조를 불러 일으켰다. 1960년대 말 학생들 대부분은 대학이 민주적이지 않다고 느끼고 있었다. 리옹의 학생동맹은 5월 8일 노동자의 자녀 중 10%만이 대학생이라는 통계를 지적하며 대학의 사회적 편향을 언급했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대학의 양적 팽창에 비해 교수진과 교육시설 및 교육내용을 질적으로 향상시키지 못하는 것은 1960년대 초반 이후부터 계속해서 누적되어온 유럽의 문제 거리였다(프랑스 대학생 수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0만 명이 안 되었으나 1960년에는 20만 명이 넘었고, 다시 10년 후에는 65만 1000명으로 확대되었다). 사회현실과 특히 경제문제에 둔감한 많은 수의 교수들의 강의는 학생들로 넘치는 대형 강의실에서의 학생들을 지루하게 만들었고, 강의내용도 학생들의 선택권을 제한해 수동적으로 참가하게 해 더욱더 학생들에게 위화감을 주고 있었다. 이 같은 현실 타파를 위해 학생들은 교과과정의 내용을 통제하기를 요구했으며, 신임교수 선정시에도 학생들이 개입할 것을 주장했다.1968년 5월 학생시위의 직접적인 동기는 교육현장에서 쌓여온 불안과 불만이었다. 5월 3일에 시작되어 13일까지 연일 증폭된 학생시위는 이러한 교육제도의 미비와 사회적 경직화, 권위주의에 대항한 항의였기 때문에 즉각적인 반향을 일으켰고, 광범위한 지지를 얻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경찰이 대학생들을 곤봉으로 때리는 것을 본 현장의 사람들과 그것을 찍은 사진이 공개되자 파리시민의 80%가 학생시위를 지지하기에 이르렀다.
III. 68혁명의 의의 1. 낡은 체제, 이념, 그리고 가치관에 대한 거부 68혁명을 주도한 학생들의 비판의식은 학내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않고 차원을 훨씬 더 깊게 확장시켰다. 그들의 분노는 당시의 서구사회가 부르주아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으로 출발했다. 그 당시 유럽의 지식층과 예술가들이 자신의 부르주아적 사회토대를 비난하고 자신들의 인식을 실천에 옮기는 운동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하나의 명백한 사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의 작가나 예술가가 아닌 수많은 학생들이 전면적으로 사회의 부르주아적 속성을 공격했다는 점에서 1968년의 항의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학생들과 교수 사이의 관계가 문제화 되었던 이유도 엄밀하게 따지면 평등을 실현하겠다는 것을 넘어서서 부르주아적 질서의 지배와 억압에 순종하지 않겠다는 젊은이들의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그 당시 혁명을 주도한 대학생들 사이에서 대학과 교육기관을 부르주아적 재생산의 도구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의 부르주아적 성격에 대한 학생들의 냉소와 비난은 “당신들의 투쟁은 우리의 투쟁”이라고 천명한 노동자들과의 연대의식에서 분명하게 드러냈다. 5월 19일 “민중에 봉사한다”는 학생운동의 전단은 “노동조건은 대자본의 체계적 공격을 받고 있고 노동자투쟁은 고용주 층의 공세를 감내하고 있다”고 했다. 1960년대 말은 아직 시작단계에 불과하지만 서구 노동자들의 탈공업화 현상이 진행되는 단계였다. 전통적 공업인 직물, 광업, 제철, 조선 부문의 노동자는 1950년대 이전보다 현저하게 줄어들고, 노동자들의 생활모습과 문화의식은 중간층과 구분하기 어려워질 정도로 성장했다. 독일, 이탈리아 등 선진 공업국에서도 순수한 육체노동자의 비율도 전체 활동인구에 비해 현저히(20~25%대) 낮아졌다. 1950~60년대에 걸쳐 이루어진 노동자들의 고용기회 안정과 주택과 자동차, 여가 같은 물질 조건의 개선은 노동자들에게 고용주와 사회에 대한 자신감을 키워주었다. 그것은 외부에서 요구되는 계급의식의 강화가 아닌 노동자들 내부에서 성장한 폭넓은 자의식이었다. 이러한 서유럽 노동자들의 탈프롤레타리아 현상이 지식인의 이념세계에도 투영되기 시작했다. 이런 이유로 1968년에 노동자들과 연대를 천명한 학생들의 문제의식은 1900년대 사회주의자들의 노동자관과 여러모로 다른 점이 많았다(1900년대의 노동자들은 생존조건 자체가 문제였으며 노조활동 자체를 제약받았다. 1960년대 말에는 많은 프랑스 노동자들이 자신이 소유한 집의 내부치장에 정성을 많이 들일 정도로 변해있었다). 1968년 5월, 수백만의 프랑스 노동자들이 학생들의 사회적 항거와 뜻을 같이해 연대한 이유는 권력교체를 원해서가 아니라, 학생운동의 내용이 기존의 노조조직과 노동자 기반의 정당조직이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것을 불어넣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수백만의 공장노동자와 사무직노동자의 파업노동자들은 임금과 노동시간에 대한 요구 대신 노동의 실질적인 참여를 요구했다. 노동이 소외당하지 않고 결실을 맺기를 원했던 그들은 노동자들도 노동과정의 전체적인 정보와 결정권에 참가하도록 하라는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결국 여러 산업부문에서 누적된 노동자들의 불만족 도한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사회 구조 자체에 대한 것이었던 것이다.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공통 변혁의 과제로 제기한 것들은 노동의 방식뿐만 아니라 공적이고 사적인 모든 행위이며, 모든 부문의 실존적 조건들로 확대된 사회혁명, 정치혁명, 국제혁명이었다. 1968년의 학생운동은 이런 점에서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반영한 것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항의가 이념적으로 맑시즘에 근거한 행동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1968년 3월, 혁명의 주체세력들은 부르주아 사회를 거부하며 그와함께 스탈린주의의 공산당, 그리고 맑스-레닌주의를 부정한다고 공언했다. 혁명의 주도세력 학생들은 특정한 사상의 영향을 받아 움직이지 않았다. 이들은 낭떼르 출신인 “3월 22일 정치운동”가담자들은 다른 사상가들에게는 부정적이고 거의 대부분 사르트르를 읽고 있었다는 점만 인정했다. 이들을 주도했던 역할을 했던 학생들이 비교적 탐닉했던 간행물은 ‘상황주의자’들이 발간하는 『사회주의인가 야만인가』였다. 결국 전체적으로 보면 68혁명은 권위라는 것을 일체 부정한 아나키즘의 정신이 강했고, 스탈린주의에서 느낀 환멸과 마오주의 하의 여러 사상이 합쳐진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1968년이 혁명적이었던 것은 부르주아 국가든 자체적으로 선언한 혁명정당이든 모든 중앙 집중적 권위의 형태에 반대했다는 점이었다.
2. 소외된 자들과 소외된 것들에 대한 관심 68혁명을 계기로 프랑스에서의 변화는 의식뿐 아니라 제도로 나타났다. 선거권이 18세로 빨라지는 등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법적 제도적으로 많은 변화가 이루어졌다. 그 중 가장 큰 변화는 여권신장분야에서 이루어졌다. 여성들은 학생이든 노동자든 1968년 시위에 대규모로 참가했으며, 그로부터 2년 뒤에 창설된 기구인 ‘여성해방운동’은 여성에 대한 차별 철폐를 강력하게 선전했고 운동을 지방 단위로 확산시켰다. 1968년말부터 여성들이 미디어분야의 취업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진 것도 이후 여성운동의 대중화에 기여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자녀양육에 대해 부권만 인정하던 법체계도 사라졌다. 1970년에는 여성이 남편의 자녀양육권에 이의를 제기하고 부모양육권으로 대체되었다. 1972년에는 여성들을 미혼과 기혼을 가리는 호칭을 거부하는 『미즈(Ms)』지가 출간되었고, 1973년 유산권에 이어 1975년에 임신의 임의적 중단을 허가하는 법이 개정되는 등 일련의 법개정을 이루었다. 이 법을 개정하기 위해 그 당시 여성 보건장관이었던 시몬 베이유는 1974년 11월 26일 의회에서 이 법안은 여성들만을 개별적으로 고려한 것이고 국민을 외면하는 취지에서 제안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로 의원들을 설득했다. 산아제한과 낙태가 불가능하게 보였던 프랑스에서 이 법안의 통과는 커다란 성취였다. 운동이 지방 단위로 확산해 감에 따라 여성보건센터, 신용조합, 성범죄센터, 여성 관련 책방과 출판사들이 전국에 걸쳐 생겨났고, 법제도뿐 아니라 프랑스 명문학교인 공병기술학교까지 여성에게 입학을 허가하기에 이르렀다. 이혼법에 관한 새로운 규정들이 도입되고 남녀동등입금법이 시행되었다. 이러한 모든 것이 1970년대에 이르러 크게 변하게 된 것은 공공부문과 서비스산업 부문 등으로 확대된 여성의 노동력 증대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노동자들의 참여와 권한이 확대된 것도 1968년 혁명이 사회적 약자를 재인식하도록 사회를 변혁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968년 혁명에서 이미 드러났지만, 신노동계급의 요구는 점점 기존의 임금문제와 생산현장을 넘어섰다. 노동조직의 통제 및 계서적 구조의 변화를 요구했고 이에 대해 보수적이던 프랑스의 기업풍토에서 당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독일의 수준에 비하면 미약하더라도 인력관리와 통제 등에 노동자 참여가 실시되었다. 톰슨전자회사나 국립연구소인 CNRS 같은 경우에는 실험실의 자치운영이나 노동자와 공동결정을 채택했다. 국영방송인 ORTF와 CNRS같은 일부 기구에서는 기술직 노동자들이 조직 전반의 전면적 목표에 대한 공동결정을 요구했다. 또한 사회적으로 무관심하게 바라보았던 약자를 이해하려는 태도는 프랑스에서 최하위에 처한 <성의 문제>와 <이민노동자>를 의식하게 했다.
3. 세계 다른 지역의 약자들에 대한 관심 68혁명은 프랑스 뿐만 아니라 국경을 넘어 세계 다른 지역의 약자들에도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68년 5월 혁명주체의 또 다른 중요한 주장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 세계의 약자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68년 혁명을 일으킨 주요한 동기 중의 하나인 베트남전쟁에서 자행되는 제국주의적 무력에 의한 폭력, 베트남 이전의 알제리전쟁, 쿠바독립전쟁, 1954년부터 1965년에까지 겹쳐서 전개된 콩고독립전쟁에서 그 나라 국민이 제국주의에 대항해 항쟁하는 장면들이 보도되었다. 1960년대 말은 1920년대나 1950년대 초의 세대와 달리 소련을 더 이상 믿지 않는 세대였다. 그들은 베트남을 지지했다. 라틴아메리카의 게릴라운동과 중국의 문화혁명을 소련을 대체하는 이상적인 모델로 여겼다. 프랑스의 주변부를 알아내고 또 이를 알리겠다는 1968년의 의식은 “국경 없는 의사단”을 만들어 실천을 이끌어 냈다. 그 운동은 간단해 보여도 한 세대의 야심찬 도전이라 할 수 있었다. 나이지리아 동부지역의 신생 독립국가인 비아프라에서 발생한 만여 명의 죽음이 보도되자 알제리 전쟁에 가담했던 공산주의자 의사인 케슈네르는 1968년 8월에 적십자의 일원으로 다른 세 명의 의사와 함께 파리를 떠나 비아프라로 갔고, 그곳의 학살을 세계에 알렸다. 그들은 보급품이 비아프라인들에게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렸다. 68혁명의 극좌파였던 의사단의 일원인 로미 브로만 역시 추방의 위험을 무릅쓰고 목격한 것들을 고발했다.
IV. 68혁명에 대한 결론 질서와 진보, 이 두 가지 명제라를 내세우는 서구 사회조직의 합리주의적 기초는 타격을 받았다. 학생과 노동자들이 제기한 1968년 5월의 비판은 산업성장, 과학의 발전, 도시화의 확장, 의료의 확충, 교육의 확대 등 인간이 계속해서 추구해야만 하는 가치들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텔레비전과 자동차를 소유해도 정신이 누추하면 생활수준의 수직적 향상을 말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런 가치들에 대한 의문 제기는 끝없는 소비를 지향하면서 사는 것이 진정 가치있게 사는 것인가 하는 것에 도달했다. 고도의 기술사회에서 문화보다 경제가 앞서가는 현상은 문명의 위기를 부르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이 점이 68혁명이 소비사회를 문제 삼은 중대한 이유였다. 1968년의 사상적 핵심어는 소외였다. 자신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외적인 무엇인가의 통제를 받고, 외부에서 던진 함정에 빠져 있다는 느낌은 가속화하는 산업사회의 당연한 결론이었다. 1968년을 전후하여 전통적인 좌파(구좌파:착취, 그것도 노동계급의 착취만을 이해했으며 소외는 이해하지 못한)에 비해 신좌파가 깨달았던 것은 사회변혁은 자의식의 변화가 동반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전선은 보수와 진보로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았고, 오히려 남성과 여성, 흑인과 백인, 유태인과 가톨릭, 프로테스탄트와 실존주의자들의 합류를 원했다. 또한 68혁명은 소외와 억압만을 직시하지 않고,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과 금지된 심정을 용기있게 드러내놓고 말할 수 있는 기회의 장도 만들었다. 남녀 간, 또는 가족 간의 어려움, 부부 간의 어려움, 사람에 대한 몰이해, 고독, 병, 노화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때까지 터부시 되어 왔던 섹스와 죽음이 영화와 언론 매체에 솔직하게 나타나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대화와 철학적 논쟁의 주제가 되기 시작했다. 억압되었던 죽음의 문제를 쓴 작품이 베스트셀러까지 되었고, 학문적 주제가 되어 과거의 의식을 탐지하는 작업들이 수행되기 시작했다. 성에 대한 문제도 이제 농담이 아니라 언어와 역사와 사회를 움직이는 요인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자본의 논리가 우선인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뿐만 아니라 가정과 공장, 그리고 회사와 학교, 재판정의 모든 규율이 민중을 억압하는 권력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1968년 5월의 혁명이 중요한 의의 중 하나는 비판에 닫혀 있던 사회에 새로운 비판의 장을 열어 간 것이다. 그리고 68혁명을 통해 사람들은 환경문제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런 현상은 1968년 이후 유럽 전반에 빠른 속도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예술은 대중의 예술로 거리로 내려왔다. 이러한 여러 양상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현상을 만들어냈다. 다시 말해, 1968년 혁명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서유럽 사회에 대학과 노동과 여성과 이민노동자, 그리고 세계 다른 지역의 약자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배려를 만들어 낸 진정한 혁명이었다. # | 2009/04/28 23:20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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